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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석재의 돌발史전] 임명→불신→그리고 숙청…그는 지금 모택동을 흉내내고 있다
작성자 이****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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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1-03-27 22: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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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구리치과권력자가 특정 인물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했다. 그런데 그 인물은 권력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좀더 정확히는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자기 마음대로 파면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권력자는 제3자를 시켜 그 인물의 타도와 격멸에 나섰다. 마치 나무에 올려놓고 밑에서 흔드는 격이다.그런 일이 실제로 1960년대 중국에서 일어났다. 최고 권력자는 마오쩌둥(毛澤東), 그가 임명한 인물은 류사오치(劉少奇)였다. 류는 중국 공산혁명에서 마오 다음으로 꼽히는 이론가였고, 1949년 중공 정부 수립과 함께 부주석에 올랐고 1954년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물론 치과광고류를 지원한 마오의 뜻이었다. 류가 중국의 제2인자이자 마오의 후계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제3공화국 시절 한국에서 박정희의 후계자가 JP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듯.마오쩌둥(왼쪽)과 류사오치.문제는 재앙에 가까운 마오의 실정(失政)이었다.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무리하고 비현실적인 경제성장 정책의 표본과도 같았다. ‘철강 생산에서 영국을 따라잡자’는 구호 아래 수확철 농민 9000만명을 동원하는가 하면, ‘참새는 해로운 새’는 마오의 말에 참새잡이 열풍이 불어 참새 개채 수가 줄자 해충이 창궐했다. 설상가상으로 4년 동안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닥쳤다. 무려 1800만명이 굶어 죽었다.대약진운동의 참혹한 실패 속에서 마오는 어쩔 수 없이 2선으로 물러나야 했다. 1959년 마오에 이어 제2대 국가주석이 된 인물은 바로 류사오치였다. 류는 기술을 우선시하고 엘리트를 존중하는 정책에서 마오와는 반대였고, 무엇보다도 마오의 실책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1962년 1월 “천재(天災)가 3할이면 인재(人災)가 7할”이라며 대약진운동을 비판했고, 그해 7월엔 마오 면전에서 소리지르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역사가 당신과 나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말로 끝난 게 아니라, 덩샤오핑과 포항꽃배달함께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해 경제 회복에 나섰다.그러나 마오는 아주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1959년에 일시 가개통폰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1964년 12월 26일, 마오는 71세 생일 잔치 중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네들은 독립 왕국을 구축하려 하고 있어. 당 내에 수정주의가 생겨날 위험성이 있다…” ‘수정주의’라는 무시무시한 어휘가 마오의 입에서 나오자 파티 자리는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1966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타도’의 주요 대상은 류사오치였다. 그가 ‘자본주의의 개’ ‘반마오(反毛) 실권파의 수령’으로 지목된 것이다. 대학생·고교생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1000만여 명 강남역왁싱홍위병이 앞장서 지식인 박해와 파괴 활동을 자행했다.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홍위병들.그걸 부추긴 사람은 다름아닌 마오였다. 1966년 8월 7일 마오는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직접 썼다. “일부 지도자 동지는 반동적 자본 계급의 입장에서 문화대혁명 운동을 깔아뭉개고, 무산 계급의 사기를 꺾고 의기양양해 있다.” 이름만 나오지 않았을 뿐 누가 봐도 류사오치를 공격하라는 노골적인 지령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주요 구호인 ‘조반유리(造反有理·반항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도 마오쩌둥이 한 말이었다.문화대혁명 때 홍위병 앞에 끌려나와 고초를 겪는 류사오치.이제 국가주석 류사오치는 어린 홍위병들 앞에서 반영구학원험악한 꼴을 당했다. 1967년 8월 5일, 감금돼 있던 집무실에서 끌려나온 류는 맹렬한 무더위 속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두 시간 동안 이른바 ‘제트기 포박’ 자세를 취해야 했다. 머리를 허리 아래로 숙이고 양손을 뒤로 뻗치는 벌이었다. 고문과 구타로 얼굴이 부어올랐는데도 홍위병들은 손에 든 ‘마오쩌둥 어록’으로 류의 온몸을 마구 찔러댔다. 그 와중에도 류는 “나도 한 사람의 공민이다. 왜 말을 못하게 하는가? 헌법은 전 공민은 인격권이 침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항변하며 존엄을 지키려 애썼다.류는 마오에게 편지를 써서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 지으며 살겠다”며 최후의 호소를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1968년 10월 국가주석 자리를 박탈당한 류는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고 당뇨와 폐렴이 겹쳤으나 전혀 치료받지 못했다. 1969년 10월 카이펑으로 이송돼 콘크리트 창고 안에 갇힌 뒤 11월 사망했는데, 구급차는 2시간 뒤에 왔고 시신은 신속하게 소각됐다.이 과정을 단계적으로 정리해 보자. ①마오는 자신의 ‘혁명 정치’의 핵심 구취자리에 류를 임명했다.→②마오는 대약진운동 실패 등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했다.→③류는 그 실정을 비판하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④마오는 홍위병을 앞세워 류 타도에 나섰다.→⑤류는 모욕을 받고 숙청됐다.→⑥마오는 자신이 꿈꿔 왔던 ‘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번 칼을 빼든 4단계에서 5단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마오는 타인의 손을 빌려 누구보다도 집요하고 잔혹하게 류 제거 작업을 수행했다.반 세기 넘게 지난 만성설사지금 흡사한 구도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①'문'은 자신의 검찰 장악을 위한 역류성식도염치료핵심 자리에 ‘윤’을 임명했다.→②'문' 정권은 부동산정책 실패, 탈원전 등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했을 뿐 아니라 울산 선거 공작, 월성 1호 평가 조작 등 숱한 비리를 저질렀다.→③'윤'은 ‘문’ 정권의 비리를 수사할 태세를 보였다.→④'문'은 ‘추’를 앞세워 ‘윤’ 타도에 나섰다.27일 공개된 요양병원국민의힘 백드롭.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임명할 당시 사진을 그대로 활용했다./국민의힘 제공여기서 특이한 점은 문혁 때 홍위병 천만 명이 했던 역할을 ‘추’ 혼자서 도맡고 있다는 것이다(오늘날의 홍위병들은 기껏 키보드나 두드릴 뿐이다). ‘추’가 ‘문’의 복심만 제대로 읽는다면, ‘문’은 마오처럼 대자보를 쓰는 최소한의 수고조차 할 필요 없이 뒤로 물러나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되는 상황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본질이 홍위병과 류의 투쟁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벌어지는 상황 역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권력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설마 ‘문’이 마오쩌둥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겠느냐고? 중국에 가서 ‘마오를 존경한다’고 아첨했던 인물은 ‘문’의 정치적 스승이 아니었던가? 자기 나라를 ‘소국’이라 낮추고 일관되게 대중 굴종 외교를 행한 인물은 ‘문’이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5단계와 6단계가 과연 성공을 거둘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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